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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폴크스바겐이 시작 되기 까지 by 달콤한인삼


자동차 역사에 대해서는 유명한 블로거들이나 여러 사이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 저기에서 그저 복사되어져 난립하는 자료들이 많아서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 많다. 그래서 한 번 시작 해 보기로 했다.


폴크스바겐(Volkswagen)의 시작에 대해서 말을 해 볼까 한다.

Obligatory
Obligatory by FatMandy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러려면 먼저, 이 사람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 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1875~1951)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 않은가? 911이라는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 그렇다. 그 포르쉐의 창립자인 포르쉐이다.

그는 현재의 체코, 그가 태어났던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보헤미아 지방의 마터스도르프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아연판 가공 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유독 어릴 적 부터 전기 기구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빈의 전기 기계 제작소에 취직하여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4년 후에는 시험 파트 담당자가 될 만큼 자질을 인정 받았다. 

독일의 다임러, 벤츠 그리고 프랑스의 파나르-르바소르등의 엔진 특허권을 가진 업체들이 엔진을 잘 공급하지 않아 자동차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포르쉐는 전기 자동차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바퀴에 직접 모터를 장착하여 미션 없이 구동하는 방식을 고안하는가 하면 4바퀴 굴림 방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1900년에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자동차 레이스에도 관심이 많아서 서킷에서 에토르 부가티(부가티 창립자)를 자주 만나기도 했다. 

1904년에는 아콥 로너 사에서 하이브리드자동차를 제작했다. 이미 100년 전에 하이브리드 개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06년에는 다임러의 기술 부장으로 스카우트 되었고 1909년에는 산악자동차경주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6년에는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되었고, 경영진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해 오스트리아의 슈타이르의 기술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다시 본인의 회사를 차려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 명예 공학박사 F. 포르쉐 유한회사, 자동차 및 엔진 개발 사무소'라고 전해진다. 현재에도 전설로 남아있는 아우토유니온(아우디의 전신)의 그랑프리 자동차를 이때 설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나 토션바 스프링 장치는 당시 가장 중요한 특허중의 하나로 전해진다. (아우토 유니온은 반더러, 호르히, 데카베, 아우디라는 중소 자동차 메이커가 결성한 그룹이며 현재의 아우리도 발전한다. 엠블럼을 이루는 4개의 원은 각각의 4개 중소회사를 의미.)

Hitler's racing car
Hitler's racing car by Chris Wevers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히틀러를 만나게 되었고 히틀러로부터 독일 국적을 취득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1934년에는 독일 국민 누구나 탈 수 있는 경제적인 소형 자동차를 만들도록 자동차 업계에 지시를 했다. 후에 히틀러는 독일노동전선에 국민차 프로젝트를 맡겼고 포르쉐를 초대 회장으로 선입했다. 이름은 폴크스바겐(국민차)공장으로 지어졌다. 히틀러가 포르쉐공장으로 하자는 것을 포르쉐가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공장 기공식 후 포르쉐는 포드 공장으로 시찰을 갔고 그곳에서 독일추신 전문가 11명을 데리고 온다. 물론 헨리 포드의 승락을 받고 말이다. 

공장이 체 완공되기 전부터 비행기 수리를 시작했고 그 부품도 생산을 시작했다. 대략적인 자동차 생산 라인이 구축될 무렵 전생이 발발했고 군수품을 위한 공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뒷바퀴 대신에 캐터필러를 장착한 퀴벨바겐, 그것을 개조한 수륙양용차 슈빔바겐, 포르쉐 87타입의 코만데어바겐이 계속해서 생산되어졌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전쟁이 끝난 후 포르쉐는 나치 정권 시대에 특수한 지위를 누린 것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갔다가 강제로 체포되어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당시 있었던 내막은 프랑스 정부나 당사자 측에서 문서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던 푸조가 전쟁이 끝나자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어올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부린 수작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후에 있은 재판에서 푸조 회장의 발언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회장에 예전에 포르쉐에게 보냈던 골프공이 문제가 되어 포르쉐는 석방되게 된다.

포르쉐는 투옥중에 프랑스의 국민차인 르노의 4CV의 안정성 테스트를 하게된다. 무게 배분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독일의 국민차에 이어 프랑스의 국민차까지 포르쉐의 손을 거치게 된 셈이다. 재판을 거쳐 집으로 돌아온 그는 356 프로토타입의 공기역학 테스트도 진행을 했다. 물론 현재와 같은 풍동 실험실이 있지 않아서 차체에 실들을 매달고 달리면 미리 준비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분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RENAULT 4CV
RENAULT 4CV by Xavier68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950년, 그의 75세 생일에는 검은색 356이 생일 선물로 준비되어졌다. 같은 해 파리모터쇼에는 포르쉐의 부스가 따로 마련 될 만큼 포르쉐라는 자동차 회사는 커져있었다. 그리고 전쟁 후 폴크스바겐 공장도 비틀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있었고 당시의 운영은 노르트호프였다. 

Porsche 356 Speedster
Porsche 356 Speedster by cloudzilla 저작자 표시

rusty bug
rusty bug by FatMandy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지난달 27일로 125주년을 맞이한 벤츠와는 다르게 폴크스바겐은 한명의 천재와 한명의 독재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이 회사는 각각 2천만대가 넘는 판매량을 보이는 단일 모델을 두개나 가지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후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타나 수정되어야 할 사항은 댓글로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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